어릴적 내 책상위에 놓여있던 못난이 인형 3개.
한 개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한 개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인상을 찡그리고, 한 개는 개중 볼만한 표정으로 귀여운 척 하는 표정이었던 것 같다. 이 세 개의 인형처럼 나는 세 자매 였고, 우리는 제일 못생긴 인형이 자기 자신은 아니라면서 서로 놀리고 미루고 하면서 자랐다. 특별히 크게 싸우는 일 없이 우애 좋게 지내는 세 자매였기에 엄마는 우리 키우기가 참 수월했다고 늘 얘기하셨고 나도 우리 자매가 참 좋았다.
못난이 인형 중 귀여운 척 하는 표정의 인형을 닮은 가장 성격이 수더분하던 둘째가 좋은 사람을 만나 먼저 시집을 갔고, 예쁜 조카도 낳았다. 첫째인 내가 먼저 시집을 가지 못해 어른들은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나는 동생이라도 먼저 시집을 가게 돼 다행이었다. 집안에 혼사가 한번도 없어서 괜히 움츠러든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시집을 가지 않아 걱정을 끼치던 나는, 시집보다 더 큰 걱정거리를 몰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기함하게 했다.
이제는 친숙하기 까지 한 그 이름, ‘암’, 게다가 ‘젊은 암환자’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암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던 나는, 그저 양성종양처럼 떼어내기만 하면 완치인줄 알고 가족들에게 괜찮다고 그래도 내가 걸려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도리어 가족들을 위로했었다. ‘나는 슬기로우니까 잘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진단을 받던 무렵 막내는 막 연애를 시작한 때였다. 연애를 막 시작하면 할 일이 참 많다. 수시로 통화하고, 만나고, 선물을 사고...참 예뻐 보였고 동생도 충격이 컸을 텐데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항암을 하고 집에 돌아와 근육통을 동반한 부작용에 시달리면서도 동생이 데이트 나가기 전 뭘 입으면 더 예뻐 보일지 봐주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고 그렇게 투병생활을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견딜만 했지만, 항암이 회차가 길어질수록 못나고 비뚠 마음이 또아리를 틀기 시작했다.
언젠가 TV에서 언니를 간병하느라 자신의 삶이 없는 동생의 헌신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드문 일이라서 TV에서 다룬 것 이었나보다 싶었다. 동생이 아팠다면 나는 열일 제쳐두고 마음을 어루만져 줄텐데 역시 동생은 동생인가보다 싶은 마음에 동생이 미워졌다. 퇴근해서 돌아온 동생이 나에게 와서 재잘재잘 얘기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돌아와서도 남자친구와 통화하기에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동생이 퇴근하기 전에 눈물을 멈추려고 했지만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서럽게 눈물이 쏟아졌다. 놀란 동생은 왜 그러냐고 물으며 나를 달랬다.
“너 참 못됐다.”
“...나도 알아, 알면서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집에 오면 언니가 너무 아파하고 힘들어하니까 무섭고 자꾸 피하고 싶고 그렇지만 언니한테 잘해야지 하면서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그렇게 둘이 부둥켜안고 한 시간은 족히 펑펑 울었던 것 같다.
특별히 동생이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내 마음의 서운함이 내가 환자인 것을 온전히 배려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고, 이제 막 사회초년생인 동생이 중증환자인 가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며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벌써 투병생활이 1년을 다해가는 지금은, 동생이 남자친구와 통화할 때 나도 곁에서 목소리를 보태기도 하고, 얘기도 나누게 되었다.
또 동생은 그날 이후, 출근하기 전이면 항상 나를 안고 말한다.
“사랑해. 고마워.”
그러면 나도 쑥스러워서 약간 코믹하게 이주일톤으로 ‘사랑해 고마워’를 대꾸하곤 한다.
평일에는 이틀정도만 남자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다른 날은 돌아와 내 다리를 주물러 주며 회사에서 있었던 재밌는 일들과 맛집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간을 보내는 내 동생. 보통 6개월정도 걸린다는 ‘항암, 방사선, 수술’ 삼종세트가 나에게는 조금 길어졌지만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고, 특히 못난이 인형 세 자매, 그중 막내가 있어서 나는 참 다행이다.
내 험한 투병 길에, 내 막내 동생이 같이 걸어줘서 나는 정말 고맙다.
“고맙다 내 동생!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