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에 한창 폐가 망가져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을 떄의 일입니다. 제 옆에는 어떤 노부부가 계셨는데 처음 들어올 때는 낮에 주무시고 밤에 활동하셔서 사람들의 잠을 너무 깨웠습니다. 아침에는 주무시다가 새벽에는 보호자인 할머니와 함께 병실에서 컵라면을 드시고, 배가 채워지면 그 다음에는 새벽 내내 복도를 운동하셨습니다. 물론 운동이라면 크게 피해될 건 없는데, 뽈대의 바퀴 소리가 거치게 울릴 정도로 열심히 운동하시는지, 새벽 내내 복도에 뽈대 바퀴 소리가 울려퍼지고, 또 20분 운동하면 잠시 병실에 들어왔다 다시 나가기를 반복. 들어올 때면 병실 문을 쾅하고 들어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이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옆자리에 있던 저는 그 피해가 더욱 컸기에 왠만하면 저는 제가 피해를 받아도 항의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진짜 너무 화가 나 어느 날 새벽 또 시끄럽게 하실 때 "좀 조용히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며칠이 지나 제가 새벽에 기침을 하니까 옆에서 "나이도 어린 게 건방진 놈"이라면서 욕을 하셨습니다. 나이가 어린 제가 한 소리 들으니 그걸 마음에 담아두시고 계셨던 것이죠.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닙니다. 저 또한 저보다 어린 사람이 뭐라 지적질하면 솔직히 좀 꼰대 같지만, "나보다 어린게!"라고 생각할 때가 있으니까요.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어이가 없었습니다. "나이 대접을 받고 싶으시면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노인 분들 자존심에 너무 상처되는 발언인 거 같고, 반면 또 얼마나 제 한 마디에 상처 입었으면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실까 생각해 따로 대꾸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응한다고 해도 퇴원을 언제 할 지도 모르는데, 괜히 옆에서 얼굴만 붉히는 것도 싫었구요. 당시에는 코로나 때문에 한 번 정해진 병상을 이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할아버지 부부가 퇴원하시도 저 또한 퇴원. 하지만 저는 당시 폐가 막 안좋아진 시기라 작년 초에는 퇴원했다가 일주일 후 외래에서 기흉이 발견되어 입원. 이런 식의 입월을 2~3번 정도 계속 반복했습니다. 1달 후, 퇴원 1주일, 다시 1달 입원 이걸 반복했지요.
그런데 무슨 장난인지 입원할 때마다 그 할아버지 옆자리로 배치되는 겁니다. 그 할아버지도 저처럼 입원이 매우 잦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몸은 나날이 약해져 가시는지, 더이상 운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낮에 주무시고 새벽에 활동하는 건 같지만, 새벽에는 과자를 부스럭부스럭 드시기만 하시더군요. 게다가 코골이 소리도 심해졌습니다. 얼마나 심하냐면 병실의 모든 사람들이 다 짜증을 부릴 정도였으며, 그 중 어떤 할아버지는 "잠 좀 자자, 잠 좀! 여기가 병원이냐, 교도소지!" 이러면서 급발진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또다시 건강이 나빠져 저처럼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움직이기를 힘들어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할아버지는 20분마다 소변 때문에 화장실을 가시는데,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어서 뽈대로 딱딱한 침상의 프레임 같은 걸 이리저리 치고 나오니 20분마다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깼습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던 문을 쾅 닫는 버릇도 있었고, 화장실을 한 번 다녀오면 숨을 너무 크게 허덕이셨지요.
당시 할아버지와 같이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던 저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말씀드려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 휠체어를 타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할아버지도 그걸 보셨는지 휠체어를 가지고 오라 하셨는데, 저와의 차이점은 저는 딱히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지만 교수님의 배려로 숨쉬는 생활이 적응될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입원 환자들이 필수적으로 맞는 포도당 같은 수액은 꽂고 있지 않았죠. 수액을 꽂지 않았기에 휠체어도 쉽게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수액을 꽂고 있었고, 휠체어를 타려면 그 수액을 뽈대에서 휠체어로 일일히 옮기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젊은데에 반해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교수님께선 그 할아버지에게 병상에서 움직이지 말고 자리에서 변을 보라 하셨습니다.
제가 봤던 노인 분들 중 대부분은 처음으로 "자리에서 변을 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한 번에 이를 순순히 응하는 분들은 몇 명 없었습니다. 대게 자존심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죠. 병실에서 변을 보는 게 창피하기도 하구요. 저 같은 경우도 자리에서 변을 보는 순간, 몸이 나빠졌다는 걸 실감나게 느껴고 좌절할 것 같아서 소변만 자리에서 소변통으로 보고, 대변의 경우는 어떻게든 화장실에 가서 봤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경우는 위에서도 말했듯 자존심이 강하신 분인데, 아마 자리에서 변을 보는 건 굴욕이자 자존심에 먹칠하는 것이라 생각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끝까지 자리에서 변 보는 걸 거부하고, 엄청나게 숨이 찬 상태로 움직여 20분마다 소변을 보러 다녔지만, 결국 나중에는 힘을 못이기고 자리에서 대소변 모두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도 몸은 점점 나빠졌고, 할아버지께선 병원에서 운동을 많이 할 정도로 답답한 걸 싫어하는데, 1~2달 동안 병원에서 가만히 있으니 이를 버티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나마 창가 자리라면 좋았을 텐데 할아버지의 자리는 6인 병실 중 가장 안좋은 위치인 가운데 자리. 병원에 입원해보신 분들이라면 가운데 자리가 얼마나 힘드신지 아시겠지요. 창가 쪽 분께서 할아버지 입원 중에 자기 자리를 넓혀 놔 할아버지의 가운데 자리는 정말 좁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시켜 휠체어에 앉아 새벽 내내 병원 복도 휠체어에 앉아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기량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힘들어 하시고, 결국 나중에는 간호사 분들에게 사정하여 병원 복도 창가 쪽으로 침대를 옮겨 그곳에서 안정을 취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오래는 못 있었습니다. 산소 발생기가 병상에만 설치되어 있었고 복도에선 산소 발생기를 쓸 수가 없으니까요. 이 시점의 할아버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먹지도 않고 그저 누워만 계셨습니다.
제 앞자리 병상에는 40대 형님의 어머니가 간병을 하고 계셨고, 그 분은 형님을 6개월 정도 간호하시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온갖 선행을 베풀어 병실에서 모든 분들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도 하나남을 믿으며, 온갖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도하라고 저를 응원해주셨고, 제 운동도 도와주셨습니다. 하여간 그 분께선 오랜 기간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 곧 돌아가실 분들이 누군지 정확히 체크할 정도의 예리함을 갖추고 계셨습니다. 그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이제 얼마 못사셔요. 다 내려놓고 천국에 가셔야 돼."라며, 좀 잔인한 것 같지만 환자에게 현실을 자각하게 하셨습니다. 곧 돌아가실 할아버지들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자기 아들보다도 지극정성으로 챙기셨지요. 이때 할아버지께선 아주머니 말을 가볍게 부정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 코로나라 방문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는 할아버지의 5살 쯤 되어 보이는 손자도 있었는데, 아무런 표현도 없던 할아버지께서 아픔은 전부 잊은 듯 손주를 정말로 반겼습니다. 손주는 당연히 어린 나리라 할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잘 모르는지 할아버지 핸드폰을 갖고 놀았지만, 그 핸드폰의 바탕화면이 자기 얼굴로 설정되어 있는 걸보고 "할아버지 핸드폰 내 얼굴이다"라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손주의 이름을 부르며 손주를 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아마 할아버지께선 자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셨을 거 같고, 아주머니에 의해 현실을 다시 한 번 자각했을 때 무서웠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선물처럼 그 날 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손주가 찾아온 것이었죠. 실제로 이런 일을 보니 코 끝이 찡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할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3일 전에 코로나로 인한 방문 제한 속에서 어렵게 마지막 손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걸보고 저는 하늘이 할아버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느꼈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제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역시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사람의 마지막에 남는 건 결국 사람이라고 생각되네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나 죽을 때 3명 이상의 친구가 장례식에 온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더해 죽기 직전 떠오를 정도로 마음 속에 간직한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도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