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천으로의 독립, 그리고 첫 신호
2024년 1월, 추운 겨울.
53년생 우리 엄마는 12년간 거처한 김포집을 떠나 우리동내 인천으로 독립하셨다.
그동안 아들, 며느리, 손녀와 함께 지내셨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공간을 갖고자 결심하신 것이다.
그러던 중 2월 초,
엄마는 일산 백병원에 약을 타러 가야 하는데 병원이 너무 멀다며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수개월 전 부터 혈뇨 증상으로 비뇨기과에 다니고 계셨던 엄마에게 나는 말했다.
“엄마, 집 근처 산부인과 있으니까 택시 보내드릴게요. 약 먼저 몇일치 타오세요.”
그렇게 택시를 보내드렸고, 몇 시간 후 산부인과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김XX님 보호자 되시죠? 지금 병원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회사에서 한달음에 달려간 나는 진료실에서 선생님께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부천 순천향 병원으로 전원, 설 명절 직전 급하게 수술을 받게 되었다.
2. 난소암 2기, 그리고 설날의 병실
진단 결과는 난소암 2기.
우리 가족 중엔 암 유전자가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자책도 많이 했다.
설날이 내 생일이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병실에서 엄마 곁을 지켰다.
3. 항암 6회, 그리고 세브란스로의 전원
수 개월 동안 6회의 항암 치료를 받았고, 결과 CT에서 복부에 3cm 정도의 물질이 발견되었다.
방사선 치료가 가능한 신촌 세브란스로 전원하게 되었고, 거처가 없던 엄마는 근처 요양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며 15회의 방사선 치료를 마쳤다.
이후 1년간 3개월 주기로 추적 관찰을 시작했고, 다행히 무탈하게 지나갔다.
4. 다시 시작된 싸움, 2차 항암
1년 고비를 넘긴 줄 알았던 2025년 8월, 폐 아래쪽에 섬유종이 발견되며 재항암이 시작되었다.
나와 오빠는 가정과 직장이 있음에도 번갈아가며 엄마를 신촌 세브란스로 모시고 다녔다.
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의료 인력과 공간 탓에 검사만 하는 날, 상담만 받는 날,
항암을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며 지쳐갔다.
결국 다시 인천에서 가까운 순천향 병원으로 재전원하여 2차 항암을 시작하셨다.
지금은 2차 항암 중 4몇 번째 시기.
처음보다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고, 잦은 변비와 복통에 시달리고 계신다.
5장. 나의 삶, 나의 죄책감
엄마를 가까이 모셔오면 편안하실 줄 알았는데 그 아픔이 너무 빨리 찾아왔고
그 무게가 나에게도 너무 크게 다가왔다.
나도 10살 딸이 있는데 아이를 돌보지도 못한 채 철이 들어버린 아이는 혼자 집에있는 일이 잦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병원을 전전하며 아이에게 신경을 못 써주는 내가 가장 죄인 같은 마음이 든다.
어릴 적,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셨고 할머니는 오빠만 예뻐하셨다.
나는 늘 찬밥 신세..
시집와서 좋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해 나갈때 쯔음 엄마의 병, 시댁 부모님의 갈등까지
모든 걸 중간에서 등에 업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힘들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쁠지도 모르지만…
나도…나만의 삶을 살고 싶어요.
6장. 끝나지 않은 여정
엄마의 투병은 단지 병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걸어온 사랑의 길이라 생각하겠다.
나는 힘들지만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끝까지 함께 걸을 것이고 나의 푸념을 늘어놓은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아픔 속에서도 사랑은 자라고,
그 사랑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라는 것을.....
휴... 또르르르르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