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동행

내가 없는 자리에도 빛은 들겠지_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양평l위본
2026.02.24 18:30 | 조회 346

빗소리가 오래 머무는 날에는 세상도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숨을 쉰다.

창밖의 빗방울이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문득 생각한다.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대답 없는 사람이 될까.

삶은 늘 앞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라고 믿었는데

어느 날부터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나는 몇 해 전부터 내 삶의 흔적을 글로 다시 만나고 있다.

마치 흩어진 사진을 한 장씩 앨범에 끼워 넣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가끔 누군가 전원 스위치를 딸깍 꺼버린 것 같은 상상을 한다.

불이 꺼진 방 안에 남겨진 게 온기였는지, 기억이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잔향뿐이다.

죽음은 예고 없는 손님처럼 각자의 시간표를 들고 찾아온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늘 다음 역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요즘 나는 ‘유언’이라는 단어 대신 작은 메모를 떠올린다.

재산의 목록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남겨 두는 일.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남겨진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조용한 부탁 같은 것.

아내와 나는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망각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걷고 있는 듯하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은 채 서 있고

아내는 옷장을 열고 그 안의 풍경을 바라보다 잠시 멈춘다.

누구 기억이 먼저 돌아오나 서로 눈치 보는 순간.

기억이 돌아오면 우리는 마치 보물을 찾은 아이들처럼 웃는다.

언젠가 내가 그의 남편인지 그가 내 아내인지 잠시 낯설어지는 날도 오겠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를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일.

인생이란 어쩌면 원을 그리며 걷는 산책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내 장례식을 상상한 적이 있다.

영정사진 속의 나는 말이 없고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나를 이야기한다.

어디선가 비스듬히 들어온 빛이 사진 위에 머물고

나는 먼 곳에서 그 빛을 따라 남겨진 사람들의 얼굴을 물끄미 바라본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삶을 포기하라는 문장이 아니라

오늘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말라는 작은 종소리처럼 들린다.

죽음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후회를 말한다.

도전하지 못한 일, 사랑을 미루어 둔 시간, 붙잡지 못한 순간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 삶에는 이미 다정한 장면들이 있었다.

글을 쓰던 밤, 아내와 마주 앉아 웃던 오후,

아무 일도 없어서 오히려 더 좋았던 하루.

모지스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지금이 가장 젊은 때라는 문장.

그 말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나이를 가리키는 말처럼 들린다.

유년의 기억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힌 동화책 같다.

가끔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 어린 날의 풍경을 보여 준다.

비료 포대 썰매를 타던 겨울,

몇 초의 내려옴을 위해 숨이 차도록 언덕을 오르던 시간.

내려오는 동안 올라갈 때의 고단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삶도 그와 닮아 있다.

힘겨웠던 오르막은 잊히고 내려오며 터뜨린 웃음만 오래 남는다.

살다 보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기꺼이 내려놓지 못하면 그 무게 때문에 정말 내려앉을 수도 있다.

손에서 놓아보니 끝내 남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나뿐이었다.

삶은 단순하지만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비밀을 품고 있다.

내일 나는 병원에 간다.

수술이라는 문 앞에 서 있으니 마음 한편이 물기 어린 종이처럼 눅눅해진다.

그러나 아직 남길 글이 있고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조용한 위로가 된다.

그래서 이 글은 유언이라기보다 오늘의 내가 남겨 두는 쪽지에 가깝다.

언젠가 내가 없는 세상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미소 속에서 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남겨질 사람들에게는 서로를 탓하기보다 오래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남은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사랑을 잊지 않으며

오늘을 살아가기를 조용히 당부해 둔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에 머물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가 없는 세상을 한 번 더 상상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직 이 빗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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