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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아들의 수학여행 경비로 45만 원이 청구되었다
2박 3일 강릉 일정
고지서에 적힌 숫자를 마주하니 멈칫...
내 학창시절 수학여행과는 이미 너무도 멀어진, 낯선 시대의 문법을 마주한 기분
뉴스를 보니 어느 중학교는 60만 원이 훌쩍 넘는 수학여행비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치솟은 물가와 전세버스비, 숙박비 인상을 감안하더라도 선뜻 납득하기는 어려운 금액
이 현상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물가 상승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지점이 보인다
오늘날의 수학여행은 아이들이 함께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며 우정을 쌓는 공동체의 체험이라기보다,
학부모의 개별적인 요구와 민원을 완벽히 차단해야 하는 맞춤형 의전 일정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는 아무 데서나 못 자요”
“우리 아이는 입이 짧아서 식단이 중요해요”
“아이가 예민하니 이동 수단은 최고급이어야 합니다”
이런 요구들이 하나둘 쌓이면 학교는 교육적 가치에 따른 최선의 선택보다, 항의받지 않을 무난한 선택을 하게 된다
비용이 오르더라도 말썽 소지가 적은 숙소를 택하고, 비싸더라도 타박받지 않을 식사를 고른다
아들 학교의 일정표를 보니, 조식은 호텔 조식부페, 점심은 한식부페, 저녁은 샤브부페...
그렇게 수학여행은 점점 고비용의 조심스러운 행사가 되어가고,
함께 웃고 부대끼며 불편함을 나누던 공동체의 시간은 점차 자취를 감춘다
이 풍경은 학교 운동장에서도 반복된다
아이들의 함성과 응원 소리는 이제 교육의 활기가 아니라 소음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운동회 날 학교에 순찰차가 출동했다는 서글픈 뉴스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초품아’라 불리는 입지의 프리미엄과 재산 가치는 기꺼이 누리면서,
정작 그 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생동감은 참아내지 못한다
교육의 편익은 소비하되, 교육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불편은 용납하지 않는 이 이기적인 태도...
마음의 상처를 예방한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지는 ‘성취의 하향 평준화’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상대적 박탈감을 줄이고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언뜻 선량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군가의 탁월함을 축하하는 공개 시상은 사라지고,
모두가 비슷한 상장을 나누어 갖는 풍경 속에서 아이들은 중요한 성장의 기회를 잃어간다
타인의 빛나는 순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법,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도 다시 일어설 마음의 근육을 기르는 법,
부러움을 동력 삼아 내일의 나를 준비하는 법
사실 이것이야말로 삶이라는 거친 파도를 건너기 위해 학교에서 배워야 할 진짜 교육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처를 줄이겠다는 명분 아래, 아이들이 스스로 단단해질 기회까지 지워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서글픈 풍경은 비단 학교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름다운동행 안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깊이 경외하던 한 회원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팬"이다
깊은 병기의 암을 이겨내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삶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환우 본인으로서, 동생의 보호자로서
철저한 식단과 운동으로 스스로와 동생을 지켜냈고,
일상으로 복귀해 해외여행을 다니며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갔다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찬란한 서사였다
그녀가 올리는 여행 기록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었다
여행 중에도 자신의 루틴을 놓지 않으려는 치열한 의지였고,
그 과정을 기쁨으로 견뎌낸 한 사람의 조용한 승전보였다
그녀가 올린 여행기의 사진을 보며, 나의 버킷리스트를 수정할 정도로..
그런 글이야말로 아름다운동행에 꼭 필요하다
투병의 정보만 오가는 곳이 아닌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는 이가 그런 글을 보며
“나도 저곳까지 갈 수 있겠구나”
“나도 다시 내 삶을 살아낼 수 있겠구나”
그런 희망의 마일스톤을 그릴 수 있는 곳이길 소망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회복을 희망으로 읽지 못하고,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잣대로 검열하는 시선들이 있다
피땀 어린 노력으로 되찾은 누군가의 일상을 불편함의 이유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치료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회복의 서사를 입 다물게 하고,
다시 살아난 이들의 기쁨을 눈치 보게 만드는 것이 과연 공동체를 위한 배려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배려의 오용이다
누군가의 빛이 내 어둠을 더 짙게 느끼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빛을 꺼버리는 것이 답일 수는 없다
공동체가 아픔에만 안전한 곳이 되고,
회복의 서사가 밀려나는 곳이 된다면,
그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집단적인 절망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랜 시간 희망의 이정표가 되어주던 선배 환우들이 하나둘 공동체를 떠나고 있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 “이 길 끝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던 소중한 이들이,
근거 없는 오해와 불편함이라는 이름의 컴플레인에 지쳐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회원 한 명의 탈퇴가 아니다
아름다운동행의 내일이 조금씩 사라지는 일에 가깝다
공동체란 본래 서로의 불편함과 부러움까지도 견뎌내며,
서로의 내일을 축복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상처를 깊이 이해하되 희망을 검열하지 않는 곳,
아픔을 품되 회복을 밀어내지 않는 곳,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웃음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곳
그런 공동체라야만 우리는 가장 어두운 밤에도 내일의 태양을 꿈꿀 수 있다
차마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을 건네지는 못하겠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그의 삶은 이미 충분히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남아 있는 스탭들 고민해야 할 몫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