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동행

영케어러를 위하여 - 서울대병원 김범석 교수님 글...

아
아름다운동행
2026.10.31 14:20 | 조회 166

동행의 어린 보호자에게 공감이 되길 바라며...

https://blog.naver.com/bhumsuk/224445257186

​

A는 23살의 여대생이다. 그녀는 한때 손톱 치장도 예쁘게 했고 핸드폰에는’ 귀욤귀욤’한 악세서리를 달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이 그렇듯이 한껏 멋을 내고 꾸미고 다녔다. 그녀와 그녀의 엄마는 다른 모녀처럼 잔소리 배틀을 벌이며 서로 ‘티키타카’하는 사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친이 암 환자라는 점이었다.

​

A의 모친은 A가 고등학생 때 암에 걸렸다. 구강에 생긴 암 때문에 수술을 받은 이후 엄마는 발음이 샜다. 입천장에 생긴 구멍을 막는 보조기를 차면 좀 낫긴 했지만 말할 때 마다 발음이 새고 콧소리가 나왔고 발음이 어눌했다. 사람들은 A의 엄마를 볼 때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가 왜 그런지 물었다. 그러면 엄마는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 했다. ‘입천장에 암 수술을 했고 방사선 치료를 했는데 수술 후유증으로 발음이 샌다, 지금은 폐 전이가 있는데 항암치료는 하지 않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은 멋쩍어 했고 미안해했다. 어색한 공기 속에 대화가 뚝 끊겼다.

​

건강한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무례한 일이었다. 잘못한 쪽은 무례를 가한 사람이었지만, 잘못을 수습하는 쪽은 늘 당한 사람이었다. 어색한 기운이 감돌 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지만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되돌이키기가 어려웠고, 상대방은 겸연쩍어 하며 자리를 먼저 뜨곤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A의 엄마는 사람들에게 암 투병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어졌고 점차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집에서만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A는 엄마의 거의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었다.

​

폐 전이가 있어도 처음에는 종양 크기가 작아서 괜찮았다. 그러나 콩알만 하던 것이 점점 자라더니 밤톨만 해졌다. 담당의사는 이 병은 항암약이 별로 없으니 지켜보자고 했다. 암이 자라는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석 달에 한번 체크했지만 그때마다 담당의사는 지켜보자고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

그러다가 폐로 전이된 종양이 점차 주먹만해지고 기침이 시작되자 담당의사는 세포독성 항암치료를 권했다. A의 어머니는 세포독성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마침 표적항암제 신약 임상시험이 시작되었고 담당의사의 권유에 따라서 엄마는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표적항암제가 힘들기는 했어도 엄마는 그럭저럭 견뎠다. 다행히 임상시험 신약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서 암이 커지던 것이 멈췄다.

​

임상시험은 방문 일정이 잦았다. A는 엄마를 모시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KTX를 타고 다녔다. 엄마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다며 KTX에서도 병원에서도 말이 없었다. A는 2주에 한 번꼴로 서울에 올라가야 하다 보니 학교에 출석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휴학을 했다. 어차피 엄마 간병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휴학할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을 자주 못 보게 된 것은 서운했다. 다른 친구들은 취업 준비와 연애 등으로 바빴지만 A는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친구들과 만나도 공통 화제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엄마 간병하는 이야기를 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나 누가 잘못한 것처럼 어색함 속에서 대화가 끊겼다

“주로 따님이 같이 오시네요. 다른 가족 분들은 안 계신가요?”

남의 속도 모르는 의사는 A가 주된 보호자냐고 물었다. 남동생과 아빠가 있지만 엄마의 간병은 주로 A가 했다. 아빠는 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야 했고 남동생은 군대에 갔다. 결국 가족 중 남은 사람은 A뿐이어서 A는 20대 초반에 ‘영 케어러(young carer)’가 되었다. 영 케어란 장애, 질병, 암, 정신건강 등의 어려움에 처한 가족구성원을 간병하고 돌보는 아동, 청소년, 청년을 말한다.

​

엄마의 치료를 전적으로 A에게 맡기는 아빠를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아픈 엄마를 A에게 맡기고 아빠는 여전히 회사에 갔고 평소 생활을 유지했다. 남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거나 엄마에게 무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각자의 일상을 유지했다. A는 아빠라도 돈을 벌어와야 네 식구가 먹고살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투병 생황이 길어지자 집안에는 엄마의 암 투병으로 인해 일상이 변한 사람들과 그와 무관하게 일상을 전과 같이 유지하는 사람들, 둘로 나뉘었고,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멀어졌다.

​

말없는 엄마 못지 않게 아빠도 말이 없었다. 병원에 다녀와 엄마 상태가 어떻다고 말하면 아빠는 말없이 듣고 알았다고만 했다. 이런저런 치료를 할 거라고 말하면 그렇게 하라며 필요한 돈을 주었다. 아빠는 아빠 나름으로 열심히 돈을 벌었고 가정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그것이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를 돕는, 가정을 유지하는 최선이라 생각한 듯싶었다. A는 아빠의 속마음을 다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언젠가부터 A가 이 집안에서 엄마를 돌보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A는 부모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았다. 집안일은 해도 끝이 없었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집안일이란 한다고 해서 티 나는 것이 아니라 안 할 때 티가 나는 것임을 A는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어설프나마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면 하루가 금방 지났고,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오가다 보면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1년여의 시간이 사라지고 없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해야 할 1년이 그렇게 송두리째 증발된 채 A는 23살이 되었다. A는 그저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

그러던 어느 날 담당의사는 신약에 내성이 생겨서 암이 커져버렸고 이제 더 이상 신약이 듣지 않는다고 했다. 신약 치료가 중단되었고, 다른 방법으로 세포독성 항암제를 권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머리털이 빠지고 토악질을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누군들 그렇게까지 하는 게 괜찮아서 항암치료를 받겠나. 어쩔 수 없으니까 받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A의 엄마는 세포독성 항암치료에 유독 민감했다.

“내가 얼른 죽어야 할 텐데… 그래야 니가 편해질 텐데… ”

이 무렵부터 엄마는 A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A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싫었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끝나는 영 케어러의 간병. A는 간병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마음 편히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연애도 공부도 취업 준비도 간병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수 있었다. 엄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런 생활 역시 좋지는 않았다.

​

A의 고민이 깊어질 틈도 없이 암 덩어리는 금방 커졌다. 담당 의사는 이제 종양이 자라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호스피스 상담을 받을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도 했다. 엄마의 폐에 눌어붙은 암덩어리가 점점 커지면서 폐를 누르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산소 없이는 숨을 쉬기 어려운 처지가 되자 엄마와 A는 호스피스 병원을 방문했다. 호스피스 병원 의사는 이 정도 폐 기능으로 그간 어떻게 생활했냐며 놀라워했다. 이 정도면 가만히 앉아있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 상태로 그간 서울을 오갔던 것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

A는 엄마의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의 큰 병원 의사는 늘 심드렁하게 이야기했기에 별일 아닌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원 의사는 당장 입원할 것을 권했다. 외래만 볼 요량으로 왔다가 엄마는 바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엄마는 통 먹지 않았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병원에 입원해서 더 나빠진 것 같았다. 병원에서 뭔가를 잘못 치료해서 나빠지는 것 같았고 A는 병원과 의료진이 원망스러웠다. 무뚝뚝한 호스피스 의사는 여러 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만 던지고 갔다.

​

A는 울었다. 엄마 상태가 나빠진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엄마가 라면 먹고 싶다고 할 때 라면을 끓여준 일, 갈빗살 구워 먹을 때 까맣게 탄 끝 부위를 떼어내지 않고 그냥 주었던 일, 숨차다고 마스크를 자꾸 벗으려는 엄마를 단속하지 못한 일, 엄마한테 신경질 냈던 일… 크고 작은 일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

막막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이런 경험이 없는 20대 초반의 친구들은 A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에게 전화하기도 꺼려졌다. 그나마 이모가 많이 도와주었지만, 엄마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모의 전화도 뜸해졌다. A는 혼자서 인터넷도 찾아보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용한 약제도 찾아봤지만 인터넷은 결국 도움이 안 됐다. 막막함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의 숨은 금방 끊어지는 것인 줄 알았지만 엄마의 숨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엄마는 숨이 차서 꺽꺽거리면서도 오래 버텼다. 숨이 심하게 찰 때마다 의료진이 와서 산소 농도를 높이고 갔다. 저렇게 힘들어 하다가 죽는 것이라면 차라리 엄마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나쁜 년 같아서 자기 자신이 미워졌다. A는 엄마를 간병하다가 힘들면 혼자서 울었다. 편안히 보내드리려고 호스피스에 엄마를 입원시킨 것인데 막상 엄마가 죽는다고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

엄마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자세에 따라서 숨찬 정도가 달라지니 자꾸 뒤치락거렸다. 밤새 기침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나오지도 않는 가래를 뱉느라 하루에 티슈 한 곽을 다 썼다. 무슨 미련이 더 남아서 저렇게 고통스러운데 버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의식은 점점 더 흐려져서 혼수상태가 된 엄마는 모질게 버티며 A의 마음을 후벼 팠다. A는 그냥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엄마가 그만 고생하고 편안히 떠났으면 하는 생각과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교차했다. 시간을 되돌이키고 싶었고 예전에 잘해주지 못한 것만 계속 떠올랐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기도 했다.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는지 신에게 물었으나 응답은 없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혼자 세상에 남겨져야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두렵다는 사실이었다.

​

엄마가 떠나고 나면 엄마가 아프기 전 남동생과 아빠를 돌보던 엄마의 역할을 A가 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였다. 이제 기껏 스물셋인 자신이 엄마의 빈자리를 메꾼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몹시 버거울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A는 혼자서 계속 울었다.

​

며칠 뒤 엄마는 A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 A는 엄마의 죽음을 담당의사인 나에게 알렸다. 담당의사는 A에게 엄마를, 환자를 마지막까지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A의 기나긴 간병이 이제야 끝났다.

A는 엄마를 간병하며 무엇을 느꼈을까? 투병 생활의 민 낯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녀가 나중에 마음 편히 아플 수나 있을까, 마음 놓고 나이 들 수는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나는 A가 그 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의 죽음 이후 얼마나 많은 날을 혼자 울었을지, 울어야 할지 역시 알지 못한다. 간병도 죽음도, 죽음 이후도 모두 힘들다는 것 정도만 나는 겨우 안다. 그러니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와도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

그러나 분명히 알고도 외면한 사실이 있다. A는 영케어러였지만 A 역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한 가족의 구성원이었고 사회의 젊은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은, 사회는 그녀를 효녀라 부르고 연민하면서 선을 그었다. 환자를 돌보는 책임은 너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이 사회에 있지 않다고.

​

병원에서 종종 A 또래의, 혹은 그보다도 어린 영 케어러들을 마주칠 때, 그들을 선 너머에 홀로 두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끌어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반문한다. 어린 보호자가 선 밖에서 소리 없이 울며 희생했기에 선 안쪽의 우리가 평온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가 외면한 만큼 그 선은 두꺼워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선 안쪽의 우리가 먼저 그 선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안쪽에 서 있는 우리가 어른이고 우리가 보듬어 주어야 하니까.

​

​

(경계의 풍경이 묻다 중에서)

​

​

​

​

​

​

​

​

​

​

⊹˚.⋆ ─── ‧⁺ ⋆☆ ⊹˚. ─── ⋆‧⁺⊹˚.⋆ ─── ‧⁺ ⋆☆ ⊹˚

1. 게시글, 댓글, 닉네임에 초성을 사용하지 마세요.

2. 게시글을 삭제하여, 타인의 댓글까지 삭제하지 마세요.

3. 가입인사 삭제, 가입정보 비공개 전환하지 마세요.

4. 회칙과 공지를 엄격하게 적용 중이니, 불이익 받는 일 없도록 주의해 주세요.

⊹˚.⋆ ─── ‧⁺ ⋆☆ ⊹˚. ─── ⋆‧⁺⊹˚.⋆ ─── ‧⁺ ⋆☆ ⊹˚

​

​

​

Naver
목록으로

댓글

3
로그인 하고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