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일... 수술대에 올랐다.
어느덧 만 17년...
해마다 이날이면 생존신고를 남기는데, 올해는 지난 글들을 먼저 찾아 읽었다.
아들 이야기, 아내와 티격태격하던 이야기... 이제는 먼 추억이 된 것도 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도 있다.
나는 시월을 좋아한다.
생일이 있는 달이기도 하고, 하늘도 좋고 먹을 것도 풍성해서 해마다 시월에는 여행을 다녔다.
2009년 시월... 생일을 지내고 가족여행도 다녀왔다. 그리고... 암 진단을 받았다.
결혼한 지 4년, 자녀계획을 미루다 얻은 아들이 태어난 지 9개월...
그 해 생일을 갓 지난, 병원 나이 서른다섯!!
차근차근 쌓아온 커리어가 빛을 발하려던 무렵, 아빠라는 이름까지 얻고... 내가 꿈꾸던 어른이 되어가던 때였다.
대학병원 교수인 손윗동서는 당시 하버드에서 연수 중이었다. 마침 동서의 대학 동기가 종합검진센터를 열었고, 지인 할인을 받아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진을 받고 나흘째 되던 날 새벽,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검진 결과를 챙겨서 서둘러 동서가 재직 중인 병원으로 가라는 말...
뭘 알아볼 새도 없이,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검진센터로 차를 몰았다.
"위암인데.. 빨리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아요."
원장님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진료의뢰서와 검사자료를 받아 곧바로 대학병원으로 갔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쯧쯧쯧."
교수님은 자료를 하나하나 살피며 연신 혀를 찼다.
혼자 교수님을 만나고 나와 진료실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데, 늦게 도착한 아내가 나직이 한마디 건넨다.
"괜찮아... 당신은 암으로 안 죽어."
당일 입원했고, 급하게 CT를 찍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하러 병실에 찾아온 교수님은 백지에 위를 그린 뒤 유문부를 검게 칠했다.
"암 종괴는 여기에 있어요."
"교수님, 수술하면 괜찮을까요?"
교수님은 그 그림에 무수히 많은 점을 찍었다.
복막파종이라고 했다. 수술은 어렵고 바로 항암을 시작하자고 했다. 남은 시간이 석 달일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유문이 꽉 막혀, 음식물이 위 안에 정체되어 있었다. 위가 스펀지 처럼 푸석푸석하단다.
비위관을 삽입하고 음식물을 빼내기 시작했지만, 그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
장기금식이 되어버렸다.
창 밖의 십자가를 보며 기도했다. "제발 수술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의도치 않게 2주 가까이 금식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손윗동서가 나서서 담당교수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아직 젊으니 개복해서 확인이라도 해보자고"
교수의 마음이 움직여 수술을 결정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뒤로하고, 수술실로 입성...
"숨 들이쉬세요. 하나, 둘, 셋..."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 기도했다.
"살려주세요. 전 아직 할 일이 많고, 우리 가족 곁에 있어야 합니다"
회복실에서 정신이 들며 했던 말..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생님 저 너무 추워요."
너무 추워서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추운 걸 보니 다행히 지옥은 아닌가 보다 했다
위를 대부분 잘라냈다. 수술 후 최종 진단은 위암 3B기, 인환세포암. 이후 병기 분류가 바뀌면서 3B기와 3C기를 왔다갔다 한다.
폴폭스 항암이 이어졌다. 한겨울... 옥살리플라틴을 맞고 나면 찬 공기나 찬물에 손끝과 목이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당시에는 6회가 기본 프로토콜이었는데, 젊고 덩치가 있다는 이유로 회차마다 용량을 올렸다. 마지막에는 처음의 두 배 가까운 양이 들어갔다. 항암에 익숙해 지지 못하고 부작용이 날 너무 힘들게 했다.
아내와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생각만 했지, 내가 먼저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자꾸 내가 없는 집을 생각했다. 아내 혼자 아이를 키우기 힘들텐데... 아이는 아빠 없이 잘 크려나... 내 부모님은 어떻게 하지??
아이가 크면 입을 옷을 미리 샀다, 내가 고등학생때 부터 즐겨 입었던 브랜드, 유행타지 않는 디자인으로 서랍장을 꽉꽉 채웠다.
책장에는 해리포터, 슬램덩크, H2, 미스터초밥왕, 삼국지와 셜록 홈즈를 꽂아뒀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이니 아이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내가 없어도 꺼내 읽어줬으면 했다.
성인이 되면 주려고 만년필과 볼펜 세트도 준비했다. 만년필에는 아이의 성을 빼고 이름만 새겼다. 내가 없으면, 아이의 성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정말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2차 항암 무렵... 항암 주사를 맞고 온천에 다녀왔다가 감염이 되어 열이 40도를 넘었다. 응급으로 입원했는데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병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다음 날이 아들 돌잔치였다.
누워서도 돌잔치에 갈 생각만 했다. 아이가 나중에 꺼내 볼 사진에 나도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돌잔치 사진 한 장은 같이 남겨야 할 것 같았다.
의료진은 극구 말렸다. 교수님께 사정하고 또 사정한 끝에 이른 새벽 외출 허락을 받았다.
항암으로 얼굴이 너무 시커메서 화장을 아주 진하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그 안색이 화장을 뚫고 올라왔다. 다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래도 그날 아들 곁에서 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