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예배를 통해서 은혜받은 담쭈아빠입니다.
오늘은 지난 수요예배 때 젊은 목사님의 설교에서 은혜 받은 말씀을 가지고 짧게 나눠보고자 해요. 예전에 "사랑과 용서"라는 제목으로 한번 나누었던 LUKE 15(누가복음)장의 돌아온 탕자.. 또 다른 시점에서의 접근입니다. 유산을 상속받고 가지고 나가서 순식간에 다 허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용서와 무한사랑을 바라보는 형의 시선입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잔치를 열고 있는 아버지를 향한 형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아버지가 잔치에 들어오지 않는 큰 아들을 향해 함께 잔치에 들어가자고 권하지만 아들은 거절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십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결국 형은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향후 분노한 형이 아버지를 죽였다거나..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의 마음을 통해 다음 행동들을 유추해볼 수는 있겠지요.
죄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 첫번째 입니다.
1. 방법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
동생은 유산을 탐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바를 다 얻었다가 잃었지요.. 목적이 유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 잃었지만 뉘우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잔치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국 용서를 구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형은 어떤가요? 목적이 유산이 아니었습니까? 목적이 유산이 아니라면 형이 분노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나머지 것은 다 내것인데 혹시나 동생에게 추가적으로 더 주어질까봐 속이 까맣게 타들어갑니다. 유산을 향한 탐욕이 견딜 수 없이 뿜어져 나옵니다. 결국 아버지의 권유에도 형은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죠..
현재의 교회에도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개판으로 살다가 온 새로운 성도가 어떤 은혜를 받는다거나 간증을 한다거나 어떤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 슬금슬금 화가 납니다. 그 동안 묵묵히 오랜시간 예배를 드려왔었고 헌금을 해왔으며 수없이 많은 봉사와 섬김을 해 온 나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 적절하지 않을까봐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왜 십일조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까? 왜 모든 수요, 금요, 주일예배에 나와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합니까? 왜 1시간에 가까운 지루한 시간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앉아있습니까? 혹시 그러면 내가 큰 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이라도 자리하고 있나요?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데 "반드시 나에게는 건강과, 물질과, 자녀들이 좋은 대학가는 것이 허락되어야만 해!!"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을 "기복신앙" 이라고 부르고 많은 교회에도 대가성의 신앙들이 넘쳐납니다. 특검에서도 항상 주목하고 있는 것이 대가성의 여부이지요? 심지어 목사들 조차도 하나님께 드려야 세상에서의 여러가지 복(?)을 받는다고 성경에 있지도 않은 표현을 가져다가 붙히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결코 세상에서의 복이 아닌데 말이죠. 하나님은 사실 우리의 물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물질이 필요한 곳은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예산을 집행하는 곳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 제사장,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 비유를 통해 교회에 숨어서 은근하게 유산에 대한 불같은 탐욕을 숨기고 있었던 형의 마음이 더 위험하다고.. 더 죄악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지요. 죄악을 용서하고 돌아오는 영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 허락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에 신앙생활 개판인 사람이 들어온다고.. 세상적이고 흠이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우리가 정죄하거나 배척할 권한을 단 한번도 주신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자.. 창녀와 새리들의 편에 서 계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 두번째 입니다.
2. 죄란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이다.
언제나 가장 쉽게 범하는 죄악중에 하나이죠. 바로 교만입니다.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의 수준과 깊이를 측정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누군가를 판단합니다.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그 판단과 권한을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우리는 언제나 쉽게 그 영역을 침범하곤 합니다.
알기 쉬운 예를 또 하나 들어볼까요?
마태복음에도 나온 포도원 비유입니다. 포도원 농장주인이 아침 9시에 들판에 나가 사람들을 일꾼으로 불러 모읍니다. 오늘 하루 포도수확을 하면 일당 10만원을 준다고 하고 데려옵니다. 점심 때가 되어 포도원 주인은 또 나가서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오늘 일이 끝나면 10만원을 주겠다고요.. 그리고 오후 4시쯤이 되어서도 나가서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오늘 일이 끝나면 역시 10만원을 일당으로 지급하겠다고요.
해질 무렵 일이 끝나고 하루의 일당을 지급할 때 분노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당지급에 대한 권한은 주인입니다. 일꾼의 영역이 처음부터 아니었던 것이죠. 인간적인 형평성과 자본주의 경제원리로 보면 용납되지 않는 구조입니다. 저는 태어나면서 부터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렸던 모태신앙 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에는 그것이 40세에 혹은 50세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영혼보다 더욱 귀하다고 보지 않으십니다. 부르시는 것은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85세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목사님의 영접기도를 받고 돌아가신 분의 구원이 시간당 단가나 가치로 보면 엄청난 것이겠지요? 과연 그런 것이 더 큰 은혜이고.. 구원의 조건에 대한 가성비가 무척 뛰어난 예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란 흐름속에서 아둥바둥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개념의 크기와 길이와 부피를 측정할 수 없어 시간이란 흐름에 빗대어 판단하고 있을 뿐이지요. 무한한 존재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100년도 안되는 시간동안의 인간의 몸부림이나 온 우주가 생성되어온 45억년이나 크게 의미있는 조건들이 아닐겁니다.
죄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 세번째입니다.
3. 둘 다 틀렸지만 둘 다 사랑을 받는다.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탐욕은 두 아들 모두에게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숨 죽이고 있던.. 착한 척 하던 아들이 오히려 더 악하다는 사실도 드러났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지요.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지란 하나님을 거역해도 되는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이죠. 부정해도 되고 돌아서도 되는 권리이기 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영혼에게도 구원을 향한 통로는 열어두셨습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시면서 말이죠..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게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온 세상을 가지고 모든 생명체를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과학과 창조력까지.. 하나님의 속성중에 거의 대부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다 네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지고 소유하고 누리고 파괴하기 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죽음까지 거부하고자 더욱 지식과 자원과 힘을 모으고 있지요. 그리고 생명체를 새로 만들어 낼수는 없으나 복제를 하면서 혹시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교만의 칼을 계속해서 뽑아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죄악과 교만에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막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천국으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힘이 다 빠지고 나서야.. 생명력이 거의 다 소진되어 눈에서 자꾸 헛것이 보이는 단계가 되어서야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라도 주의 이름을 입술로 시인할 수 있다면 축복인 것입니다. 세상 끝에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곳의 죽음에는 구원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길을 가르치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선교사이지요. 가서 전하는 것에 순종하면 그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인 것이니까요..
저도 큰 아들입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상당한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네요. ㅎㅎㅎ
그리고 어렸을 때 한 사건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습니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만원을 훔쳤습니다. 그 사실이 발각되어 저는 동생이 보는 앞에서 죽도록 맞았습니다. 보통 그런 학습효과는 동생이 돈을 훔치지 않게 만들어야 정상인 것이죠... 하지만 제 동생은 아버지 지갑의 모든 현찰과, 상품권까지 싹 다 빼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2주후 돌아와서 단 한대도 맞지 않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사랑과 용서가 참으로 숨넘어가게 부글거리는 열매의 이름입니다.
동행의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암에 걸리기 전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암이 걸리고 투병생활을 하면서의 사랑과 용서.. 같은 의미인가요? 다음 시간에는 찬양을 통해서 은혜받은 담쭈아빠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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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열고.. 흉선을 떼어내고, 폐도 일부 떼어내고.. 심막도 일부 잘라내고 했던 시간들입니다.
호흡기계열 환우들에게는 익숙한 도구일꺼에요. 여전히 4000 정도까지 올려보려고 연습을 하곤 해요.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이유는 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