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동행

[TIJ]기적을 품은 이야기 "놀이터- 마지막편"

이기자후후l대본
2021.02.17 01:08 | 조회 861

감옥에서 만난 하나님

서울 남부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존'과 마주쳤다.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할때 "살아계시는 하나님"등의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오그라들거나 유난스럽게만 느껴졌던 내 이성의 한복판에 말그대로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들어섰다. 40여년을 교회를 다니며 그렇게 갈망하던 신의 실존을 맞딱뜨렸을때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는 성경에 대한 신뢰변화였다. 기록과 역사로 인식해왔던 아니 조금 더 후하게 점수를 주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적어낸 조상들의 거짓없는 증거정도로 평가 할수 있었던 성경은 생명을 품은 살아 있는 "약속"들임을 내 오감이 인지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재판과정에서 성경에 기록된대로 행해여 지는 소름끼치는 일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는 위증자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재판에서 고소인에게 유리하게 검찰조사때 거짓 진술서를 작성했던 5명의 법인대표들을 하나같이 재판시 증인 출석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하셨다. 형사재판의 경우 타당한 이유없이 증인출석을 거부할 경우 강제소환이나 벌금에 이르는 처벌이 가능하기에 출석통보를 받은 증인들은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한다. 거짓 진술서를 작성했던 5인의 법인 대표중 4개의 법인이 검찰조사에서 2심에 이르기까지 약 2년의 기간동안 법정관리와 부도를 당한 증거서류들을 불출석 사유로 제출했고 나는 그들의 불출석 사유서를 한장 한장 접할 때 마다 우연으로 설명하기 힘든 소름끼치는 하나님의 위엄을 느꼈다. 남의 재판에 거짓 진술서를 작성하여 판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억울한 사람을 감옥에 가둔 죄라면 어떤 신의 입장에서도 가볍게 용납하기 힘든 것임이 분명하기에 나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단이 일면 상당한 타당성으로 와닿기도 했다.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증인신문을 이끌어 가게 하시고, 신문중에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패이스를 다 잃고 거짓을 자백해버리는 고소인을 목격하게 하시고, 위에 언급했던 거짓 증언을 했던 5인의 법인 대표중 4인은 회사가 문을 닫고 마지막 한명은 2심 재판 마지막 즈음에 '자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자술서는 2심 판결문에 인용되어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다.

실존을 접한 자의 마음

하나님의 실존을 접한 나는 두려운게 없어졌다. 1심 판결문처럼 3년 실형을 살건 그로인해 내가 그동안 내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건 이런건 더이상 내가 집착할만한 일이 안되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다 하신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에 더이상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재판부에 대한 마음도 달라졌다. 제발 내 사건좀 잘 살펴주세요, 제발 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가 아닌 그간 힘겨운 재판을 이끌어 주신 재판부에 대한 감사로 나는 내 마지막 서신을 전했다. 종교적 문구를 적시하지 마라는 변호사의 간곡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를 마지막장에 담담히 적시하였다.

선고 -2017년 7월

구치소에서 선고일을 맞는다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라 같은 방에 있는 수감자들까지 함께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여성 수감자들의 경우 가벼운 경범죄가 많기 때문에 집행유예로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선고날에는 누구든지 출소를 할수있다는 희망으로 자신의 짐을 다 싸두고 법원에 출정을 나간다. 법원에서 일단 석방이 선고가 되면 다시 구치소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수감자가 석방되었을경우 교도관들은 해당 수감실로 방송을 통해 "누구 누구 석방되었으니 짐을 내놓으세요"하고 지시를 한다. 여기서 잠시 경제사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종종 접하는 횡령이나 사기 배임등의 경제사범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는 상황은 손실보존이 되었을 경우가 99%이다. 경제사범은 말그대로 금전적 손실과 피해에 대한 형벌을 받음으로 그 손실이 보존되었다면 실체적 손실이 만회되었다고 볼수 있다. 손실이 보존된다고해서 범죄행위자체가 없어지는것은 아니기때문에 손실이 100%보존되어도 무죄가 아닌 집행유예로 판결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말해 실제로 검사의 공소장에 적시된 손실금액에 대한 보존이 없다면 1심의 판결이 항소심에서 바뀔 가능성은 경제사범의 경우 전무하다고 보는것이 맞다. 손실금액에 대한 양형 기준이 다른 범죄에 비해 경제사범의 경우 꽤나 도식적이고 확정적인 까닭도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 고소인이 주장한 계열사 손실부분에 대한 보상이나 합의를 전혀하지 않았고 적지 않은 금액을 회사로 돌려넣는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집행유예는 꿈꿀 수 없고 오직 모아니면 도, 무죄아니면 원심확정을 그대로 안고가는 결과뿐이었다.

선고일 고등법원의 법정은 공판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수십명이 수두룩 빽빽하게 줄을 서서 선고를 기다리다보니 정치사범등 주요사건이 아닌경우에는 판결문을 읽기는 커녕

한두줄로 결과만 말하는게 다였다. 그간 치열하게 싸우던 공판 검사도 피고인이 유죄를 받건 무죄를 받건 선고일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언제나 자상하시던 재판장의 얼굴은 근엄해 보였다.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은채 판결을 이어나가셨다. (그날 내 선고 후 나의 재판장님은 판사로서의 최고봉인 헌법 재판관으로 바로 임명이 되셨다. 1심에서 유죄를 받은 피고인에게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판사도 언제나 틀릴수 있다는 겸손과 성심으로 재판을 이끌어 주신 재판부를 향했던 나의 마지막 기도까지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시는 듯했다.)

"특정 경제 처벌법에 관한 사건번호 xxx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기에 무죄를 선고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교도관에 이끌려 나왔다. 한국말을 못알아듣는 것인지 나는 교도관에게 순진한 아이의 눈망울로 뻔한 이야기를 물었다. "저 지금 나가는거예요?" 교도관이 웃으며 이야기한다. "내 오늘 아침에 너 데리고 나올때 부터 느낌이 딱 나갈 사람 같더니만.." 무슨 말인지 지금까지도 알수 없는 묘한 말을 던진 쇼커트의 교도관은 나를 끌고 사무실로 가서 석방절차를 밟아주었다.

법원을 나서니 항소심 내내 재판에 참관했던 내 1심 변호사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나를 반겨주었다. 7개월만에 처음으로 빨대를 사용해 마셔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는 한입 빨아드리고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더이상 마시지못했다. 한 여름 구치소에서 차가운 물한잔 마시지 못하는 같은방 수감자들 생각에 미안함이 시원함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이 죄가 있건 없건 실제 나쁜 사람이건 아니건, 아침까지만해도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과는 달리 화려한 투명 일회용 컵안에서 출렁이는 커피 한잔을 마셔도 될만큼 나는 특별한 사람이던가. 지금쯤 내 석방소식을 듣고 기뻐해주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니 차마 목으로 차가운 음료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한 현재에도 살고 있는 세상의 '동행'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동행

이렇게 큰 일을 겪고 나는 내 인생의 고난은 끝이 난줄 알았다. 아니 이제 하나님까지 만났으니 내 인생의 봄날은 드디어 시작될줄만 알았다.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특권을 누리며 살아왔던 인생이라 여겼기에 이제부터 펼쳐질 날들은 상상하기조차 벅찬 환희만 있을줄 여겼다.

석방 후 나는 하나님과의 서언인 가족곁을 절대 떠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위해 미국본사로 돌아왔다. 고등학생 초등학생 아이들을 가까이서 돌보며 동분서주 살아가는 날들이 꿈을 꾸듯 행복했다. 이렇게 만 3년이 흐른 어느날 나는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게되었다. (그 전후 사정은 이미 동행카페에 올린 글들과 중복되기에 각설한다)

수감 생활이 내게 하나님의 '실존'을 알려준 시간이었다면 암과의 투병은 하나님께서 내게 '실행'을 훈련시키는 시간이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된것만으로 세상이 내것이 되지는 않는것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실행해 나갈때 결국 하나님의 축복속에 온전히 안착하는 것이었다. 내가 항암 6차후 MRI로 간전이 소견을 받았을때 그 험난한 이야기를 동행 카페에 올리면서 "하나님 또 작업하시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내 허세도 과장도 아니었다. 나를 통해 인간이 생각지 못하는 계획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던 그 하나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때문에하나님의 작업에 대한 신뢰는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인간이기때문에 겪는 불안함과 욕심은 당연히 존재하였지만 이와 싸워나가는 나 자신을 이번에는 나 혼자가 아닌 동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퍼포먼스를 펼치시고 계심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하염없이 무너지기도 했고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통해오는 알수 없는 평안을 가져보았고 무엇보다 4기 환우들의 좌절을 뼈져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죽음 앞에 단 한 발자국 더 다가선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는지 깨달은 나는 그 후로 동행 환우들의 작은 변화에도 함께 가슴 무너지며 더 절실히 기도할 수 있는 앎을 얻었다. 하나님은 카페 동행에서 동행하시며 우리를 동행하게 만들고 계심이리라.

원래 나는 내 이야기를 하거나 어디에서 나를 드러내는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 카페에서 단 한번도 꺼내보지 못했던 내 험악한 이야기를 폭로하고 공유하는 이유는 함께 동행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끼리 위로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수평적 동행, 신과의 소통을 통해 치유를 완성해가는 수직적 동행, 이렇게 동행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수감생활과 치병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정확히 느낀 한가지가 있다.

고난의 완성은

인간의 노력

하나님의 혁명이 함께 할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혁명이 동행하는 곳,

우리가 고난을 완성해 나가는 이 곳 아름다운 동행에서

세상을 이기는 어른들의 행복한 놀이터를 희망해 본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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