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 오후 10시 45분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2016년,
당시 55세에 명예 퇴직 신청 후 받으신 건강검진에서 암수치 증가 소견 있었으나 영상자료에서는 찾기 어려워 간암 판정 받기까지도 두어달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색전술.. 냉동술.. 고주파.. 부분절제 하고싶었으나 간경화가 있으셔서 불가능..
처음엔 1년에 한번하시던 거 두번, 세번, 늘어나게 되고 반복되다보니 전이암 위치가 좋지 않아 이식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남동생이 간이식 적합판정 받았으나 아버지가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설득하여 이식 검사 중 목뼈에 원격전이 소견.. 이때 정말 모두가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곧 이어지는 넥사바, 옵디보, 카보메틱스..
항암제를 바꿀 때마다 성적표가 좋지 않다며 걱정하시던 부모님.. 마지막 카보메틱스는 부작용으로 아버지가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 많은 치료들을 견디셨음에도 불구하고 흉추 전이, 골반뼈 전이, 림프 전이까지 ㅠ
정작 원발암인 간이 괜찮으면 뼈가.. 뼈가 괜찮으면 또 다른 곳에 전이.. 아버지 마음이 어떠실지 가늠도 안되었습니다.
지난 겨울방학 전까지는 아이 학교 운동장에 앉아 아이 음료수 사들고 아이 뛰는 모습도 구경하셨는데.. 2월 말경 카보메틱스 중단과 동시에 지독한 통증, 식사 불가능, 대변 어려움이 시작되었고 아이알코돈과 타진으로 견디실 수 없을 정도가 되셔서 3월 첫째주 요양병원으로 입원하셨습니다. 가까운 곳에 지인찬스로 1인실에 모셔 엄마가 상주하시고 가족들 모두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요양병원에서도 잡히지 않는 통증으로 힘들어 하셨고, 식사를 전혀 못하시니 여명 2개월 정도 본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삼성서울 갔을 때 호스피스 진단서 끊어 올 걸.. 후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치료도 골든타임, 꼭 해야하는
적기가 있지만 마지막도 골든타임이 있다는 걸 지나고야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신 것도 담당의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닌 상황이었기에.. 아버지께 상황 설명과 호스피스에 가실것인지 우리가 아빠의 연명치료를 하길 원하시는지.. 여쭤보는 것도 모두 제 몫이였습니다.
너무 마음 아프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더이상 붙들어 지지 않는 아빠를 하루라도 더 붙들겠다고 고통 속에 두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 하실 수 있도록 도움 드릴 방법은 없는지 고려해 보았을 때 남은 여생 동백성루카병원으로 전원하시는 게 어떨지 여쭤보게 됐고.. 아버지는 “아프지만 않게 하면 된다.. 가자 오늘 당장 가자” 라고 하셔서 이튿날 대리진료를 통해 삼성서울병원 주치의와 상의 후 호스피스 전원 진단서와 마약성 패치를 처방받아왔습니다.
아버지와 상의 전에 성루카 외래 예약을 걸어두었지만 어마어마한 대기로 매일매일 전화드렸습니다. 아버지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어서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오늘 당장도 30분이면 갈 수 있으니 취소되면 전화주십사.. 다행스럽게도 며칠 앞당겨 대리진료 볼 수 있게 되었고 입원도 생각보다 빨리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미 요양병원 퇴원 이틀 전부터 몰핀이 주입되고 있었고 성루카가셔서는 용량이 차츰 늘어나 유지되었습니다. 통증이 줄어드니 아버지 얼굴도 밝아지시고 미음도 잡수시고, 이전처럼 농담도 하시더라구요. “야 아빠 종부성사했다?? 넌 그거 하고 죽을거 같으냐?? 나는 무결한 인간이다 지금..” 이런 말씀까지 웃으며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2주쯤 흐르니 점점 인지기능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말씀으론 아기가 돼가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휴대전화 사용에 능숙하셨는데 잘 안됩니다.. 말씀에 맥락이 없어지고 임종에 가까워지실수록 간성혼수가 동반돼 당신이 왜 링거를 맞고 계신지 잘 모르시고, 집에 가자고 하시고 도망가자고도 하시더라구요.. 기력은 점점 저하되셔서 낙상할까봐 누워계시라고 해도 간호사실까지 걸어나가시는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 늦둥이 아기와 사진도 찍으시고”우리 짜장면이나 한그릇씩 먹고 집에 가자“ 이러셨는데 이 모습이 사무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별 말 아닐텐데 아마도 저는 평생 기억하는 말이겠죠..
돌아가시기 나흘전부터 소변이 나오지 않아 소변줄을 하시긴 했지만 가족들과 베드 째 나가 바람도 쏘이셨습니다.. 사흘전부터 본격적으로 임종기 증상이 시작되더라구요. 대변은 전혀 나오지 않으셨고 눈도 뜨기 어려워하셨으며 깨어나실 때마다 자꾸 일어나 나가자고 하셔서 버티다 버티다 진정제 놓아드렸습니다. 진정제가 처음엔 두어시간 정도뿐이 효과가 없었는데 갈수록 11시간, 12시간.. 주무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이틀 전 아기 목소리가 들리니 주무시다가도 안간힘 쓰셔서 눈뜨셔서 아기 보시고는 미소 보이셨고 앉혀달라셔서 잠시 앉아계시기도 했습니다. 허리 아프시다고 의사 표현도 하셔서 진통제 놓아드리기도 했구요.. 점점 숨소리가 좋아지지 않으시고 가래도 차올라 석션을 몇번 해야했습니다. 오랜시간 깨어나지 않으셔서 밤에도 모두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저희 곁에 더 계시고 싶으셨나봐요..
임종 당일은 오전부터 숨소리가 좋지 않으셨습니다. 오전 중엔 짧고 얕게 쉬셨고 시간마다 점점 더 짧아지시다가 오후부턴 점점 호흡을 내뱉으실 때 소리를 내셨습니다. 그래도 오전 중엔 눈은 잘 못뜨시지만 아기 소리 듣고 눈동자도 움직이려 안간 힘쓰시고 당신 혼자 손도 들어올리시며 깨어있다는 신호를 보내셔서 아빠께 하고 싶은 말들 했습니다..
밤이 되면서 모든 가족들이 방 안을 채웠고.. 아빠가 한 숨 이후 다음 숨까지의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길어지시다가 소리가 들리지 않자 제가 “아빠!!!!! 안돼!! 숨 쉬라고!!!“ 소리지르고 말았죠.. 더 이상 아버지는 호흡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63세 따수운 봄에 먼길 가셨습니다.
이후론 아버지께서 평소 입으셨던 옷으로 갈아입혀 주시고.. 마지막 온기를 느끼고 못다한 이야기 전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시간동안도 안믿겼고, 지금도 안믿깁니다.. 처음 겪어보는 슬픔을 뛰어 넘는 감정인지라 버거울 따름이지만 아버지가 빛을 찾아 잘 가셨길 바라며 저는 이 자리에서 계속 기도해야겠죠?
——————————-
아부지,
전하고 싶은 말은 참 많은데 이 글도 몇번을 끊어 썼는지 몰라요. 명퇴하시면서 로망이셨던 집도 직접 지으셨는데.. 그집에서 오래오래 계실 줄 알았는데..
지난 9년간 아부지가 투병하시면서 있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여기에 다 담기지도 못할 만큼이겠지요.
아부지 호스피스 가시면서 본원 차트 떼어보고 제가 얼마나 울었는가 몰라요. 색전술 하시면서 많이 초조해하고 떨림있었단 글을 보고 우리한텐 내색도 안하고 두 분이 조용히 다녀오셨었는데, 그때도 지금 호스피스 가셔서도 날이 갈수록 얼마나 아빠가 무서울까.. 짐작도 안돼서요.
아부지,
제가 어디있든 딸이 부르면 간다고 먼 길도 마다 않고 달려오시던 아부지, 치맥하며 우리 고민도 들어주시고 친구같던 아부지.. 술만 자시면 기분 좋으셔서 노래방도 같이 가고 주머니에선 용돈이랑 노가리가 나오던 우리 아부지..
근데.. 진짜 갔네 .. 가버렸네 ㅠㅠ
나도 아직 아빠 필요헌데.. 아기들도 아직 다 안컸는데.. 다음주가 막둥이 돌인데 ㅠㅠ
아빠, 다음엔 우리 친구로 만나서 같이 여행도 다니고 술도 한잔하고 같이 늙어가요. 꼭이요!!
그리고 엄마 걱정은 하지 말아요. 말씀 안하셔도, 몸 안좋은 중에도 우리 집 옆으로 이사 감행하신 아빠 마음 알고 있어요. 든든한 아들과 딸래미 옆에 있으니까..
멋지고 자상한 우리 아부지..
그간 열심히 사셨고 고생 많으셨어요.
그곳에서 아빠가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했던 할아부지랑 술한잔 자시고 기다리고 계셔요. 내가 우리 애기들 키우고 아빠처럼 열심히 살다가 아빠보다 더 할매돼서 갈테니까..
아빠 빛을 보고 잘 도착 하셨겠죠??
사랑하는 우리아빠 ~❤️안녕
——————
그간 아버지의 사소한 증상들부터 굵직한 것들까지 이 카페를 통해 많은 도움과 위로 얻었습니다. 환우분들, 가족분들.. 모두 몸도 맘도 건강하시고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동행카페 모든 분들께 감사했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