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에서 깨서 멍하니 있다가
창문 밖으로 빨간 불빛이 비치길래 봤더니
어떤 이웃 분이 구급차에 실려가는걸 보았습니다.
동행하는 가족분의 덤덤한 모습이 보이길래 생각이 조금 많아졌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보내드린지 반년하고 보름이 지났습니다.
사는게 그렇더라구요. 눈앞에 놓여진 나만의 현실을 살아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반년이 넘었습니다.
직접 마지막 숨을 지켜보았고 장례도 치루고 요즘도 비석에 담뱃불 하나 소주한잔 부어드리러 가지만
사실 아직도 돌아가셨다는 느낌보다는 자취하던 시절 따로 살아서 자주 못뵌다는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듯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심에도 투병 전 평소와 같던 일상을 살다가
그 구급차를 보고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마지막 입원전까지 집에서 입으시던 깔깔이를 꺼내서 냄새를 맡아봤습니다.
아직 채취가 남아있는것 같거든요.
그리고 오랜만에 동행을 찾아오니 많은 분들이 본인과 가족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고 계시는걸 보았습니다. 진심으로 쾌유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준비하시는 분들.. 마지막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시는 분들..
조금이라도 남은 가능성에 희망을 갖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사실 저도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워낙 짧게 앓으시고 급하게 가시느랴 저와 아버지는 마지막 준비가 거의 없었거든요.
워낙 건강에 대해선 걱정되지 않았었고
놀랐지만 발견한 암도 작은 혹이었기에 수술 한번으로 털고 일어나실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명줄이 길다."라고 본인이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위치가 애매해서 항문을 살리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먼저 받으셨는데 그 사이에 간으로 전이가 되더라구요. 그것도 조그마한 점들이 퍼진 다발성으로요.
그때까지만 해도 바로 발견하기도 했고 퍼지긴 했지만 정말 작은 점이었기 때문에 잡을수 있을것 같았는데
정말 빨리 퍼지더라구요.
얼마나 빨리 퍼지는지 직장암 수술을 강행하여 원인암부터 제거하려 했지만
암이 빠르게 퍼질때마다 열이 나셔서 수술실은 근처도 못가셨어요.
항암이라도 계속해서 속도라도 늦추려 했지만..
그때도 의사선생님 분들이 부족하셔서 치료와 입원 스켸쥴이 밀리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점점 간에 암이 커져서 결국 간성 혼수도 오시고 황달도 오시고 그러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단 3~4주 시한부 선고를 받게되고 그러고 나서도 정말 급하게도 가셨습니다.
참 운도 많이 없으셨지요.
저희 가족들은 눈뜨고 당했다..알고도 못막았다..이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1기와 2기 사이에 발견해서 당연히 수술 한번으로 나을줄 알았는데
수술 준비하며 방사선과 항암 3달
간 전이 발견되고 급한 진행에 수술도 못하고 버린시간 한달, 이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같이 일과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급격한 병세악화부터 시한부 선고까지 한달
그후 임종까지 한달
그렇게 건강하셨고 발견한 암도 작았는데
사실상 걱정없이 치료하던 3달을 제외하고
단 세달간 사투를 벌이다 가셨으니까요
사실 누구를 정해서 원망할수는 없었습니다.
그 간전이도 너무 작은 점들이라서 그나마도 겨우 발견한거니까요.
요즘 사정에 치료 밀렸던거..그것은 많이 아쉽긴 했지만 그 당시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냥..아버지가 운이 정말 없으셨다..애써 이렇게 생각할수밖에 없더라구요.
저는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렸습니다.
호스피스에서도 이틀도 못가셨고
그나마 임종만큼은 임종실에서 하셨다는게 위안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마지막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정작 돌아가시는 본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를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본인만의 마지막 정리는 전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 조차도 돌아가시기 한달전 3~4주 시한부 선고를 받을때는
제가 봐도 황달에 백혈구수치가 바닥이었고 안색부터 너무 안좋아서 3주는 커녕 오늘 내일이라고 가실수 있겠다 생각할정도로 정말 갑자기 너무 안좋아지셔서 상당히 당황했었거든요.
겨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버지께 울면서 "아빠 얼마 못산대"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정작 본인이 " 니 아빠 그렇게 약한사람 아니다"라고 하시며 실제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시기도 했어요.
항달, 백혈구와 체력 등 회복된걸 본 담당의 소견도 (병세가 워낙 급하게 진행된거라) 아직 안써본 항암제도 많으니 치료를 지속해보자고 하셨기 때문에
나을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한달을 살았던것 같습니다.
잠시 퇴원해서 집에서 가족끼리 식사도 하고
지팡이가 필요하긴 했지만 운동도 챙겨서 하시고
꼭 낫고 말겠다는 의지가 정말 크셨기 때문에
저도 낫겠다고 믿었었어요 사실
한달 버티고 세달 버티고 식사와 근육을 회복하고 그러실줄 알았거든요.
장례를 치루고 지나고보니 그게 본인이 원하던 집에서의 휴식과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낼수 있었던 회광반조 였더라구요. 하지만 그때는 그걸 깨닳지 못하고 회복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사실 임종하러 가시는 마지막 입원때 조차도 못하는 식사를 수액으로라도 보충하고 통증을 잡기 위해, 그리고 나서 다음 항암을 준비하러 간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문밖을 나가시는 순간이 살아서 마지막이었음을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 문밖을 나선지 5일만에 말을 잃으시고 호스피스, 7일만에 임종을 맞으셨거든요.
그래서 임종에 대한 준비가 정말 안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의 준비 마저도 입원 후 하루하루 계단 내려가듯 안좋아지는 아버지 상태를 보며
"결국 안되는건가..아니야 일어나실수 있을꺼야.."이런식으로 마음 한켠으로는 마지막이 예감되지만 절대 인정할수 없는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당장 고인의 마지막 말이 "아 이거 왜 이렇게 안낫지"였을 정도로 마지막 직전 눈동자 깜빡임까지 삶의 의지를 전혀 놓지 않을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 숨을 뱉고 나서야 뒤늦게 아버지 귀에 인사를 하는것으로 겨우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유언도 없었기 때문에
임종과 장례부터 목사 작은아버지와 기독교이신 어머니,
생전 교회와 담을 쌓고 사시던 아버지를 생각해서 제사를 올리고 싶었던 저때문에도 조그마한 갈등이 있었고
남기신 사업도 본인의 마지막 준비, 하다못해 한마디의 지침도 없었기 때문에 우왕좌왕 유품과 상속을 정리했고
제가 다니던 직장과 생활을 정리하고 같이 일하던 기억을 더듬고 아버지의 생각을 유츄해가며,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항우울제를 먹어가며 겨우 그 사업을 추스려 가고 있습니다. 사실..이 공장은 잇기 싫었거든요..
사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죽음의 과정과 죽음, 죽음 이후를 자식으로서 슬픔과 그리움으로만 보내는게 아닌,
아버지를 잃고나서 생긴 혹독한 현실을 36살이 되어서야 맞아가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아버지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간절합니다.
이렇게 일을 해놓고 이렇게 돌아가실꺼였으면
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마지막 준비를 했어야했나.
.라는 생각히 이제서야 조금 드는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동행카페에 찾아와서
마지막 준비라는 현실을 맞으신 분들, 혹은 마지막을 겪으신지 얼마 안된 분들의 글을 보며 글을 적어봤습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부럽다 싶을정도로 준비의 시간을 겪는 분들도 계셔서 다시 한번 부러움과 응원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