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개월 동안의 동행을 끝으로 11월 10일 19:30 경에 먼저 소풍을 가셨습니다
동행하는 기간 동안 카페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저도 아는 한 도움을 드리려고 글을 남기고 싶었지만 정신이 없어 댓글로만
활동 한 부분 아쉽고도 감사했습니다
다른 분들과 같은 마음으로 저와 어머니의 발자취를 남겨 놓을까 합니다..
다들 꼭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대장암 간전이
22년 3월 친인척 중에서도 겪어본 적 도 없고 생각해본 적 도 없는 암을
어머니와 함께 마주한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머니가 소화도 안되고 배가 아프다는 말에 동네 CT잘보는 3차병원을 알려주었고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겠다는 검사결과..
대학병원으로 혼자 옮기신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가늠이 안됩니다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 퇴근시간 즈음 "보호자로 와줘야겠다 아들"
이 말이 아직도 생생하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슬픈 눈물을 회사에서 하염없이 흘렸던 걸 기억합니다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신없이 운전해서 병원에 갔고
응급실 복도 앞에서 입원수속을 기다리며 담담 한 척 앉아 계시던 어머니는
"갈 때 되면 가야지"
"우리아들 결혼하는 건 보고 가야하는데 못 보는 건 아쉽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살면서 이렇게 까지 슬픈 감정을 억눌러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울음을 참았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옥이었으며 결과는 더 큰 지옥이었습니다 '대장암4기 간전이'
1,2,3,4기 4개나 있는데 왜 4기 일까
그 동안 건강검진 한번 데려가지 않은 자책과 원망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듯 합니다
기차여행
지방 병원의 한계를 느끼고 실패 한 스텐트 시술을 하기 위해 서울삼성병원으로 전원을 하는데
퇴원 후 집에서 1박을 해야 할 때 위에서 가스를 뽑아내기 위한 콧줄을 하고 계셨는데
콧줄을 달고 머리를 감는다고 고집 부리시면서 결국은 머리를 감으시는 모습에
얼마나 화를 냈던지
되돌아보면 정말 걱정거리도 아닌데
그 때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당장 어떻게 될까봐
그렇게 처음 결제 한 SRT기차표, 얼마나 긴 싸움이 될 지 몰랐는데 지금은 SRT 표 구하는데 도사가 되었네요
( 항암 기간 동안 SRT 표 구매 횟수를 보니 318회, 금액으로는 1602만원 .. )
수 많은 기차여행은 저에겐 전혀 힘들지 않은 추억이었고 돈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서역' 이라는 장소는 저에게 가슴에 미치도록 사무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서울삼성병원에서 시작 한 '고식적항암'
고식적 이라는 단어도 처음 알았고
암이라는 질병에 이렇게 박학다식 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항암 시작과 끝
첫 항암제는 폴폭스(옥살리플라틴,류코보린,5FU)+아바스틴 으로
2주마다 서울로 SRT를 타고 동행하며 5FU 48시간이 지나면 부산 병원에
주사 제거를 위해 연차와 외출을 참 많이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 간병을 위한 연차는 최종적으로 86개를 적었더군요 )
어머니는 부작용도 크게 없고 내성도 바로 생기지 않고 약들이 잘 맞는 편이라
항암을 하시면서도 참 많은 추억을 쌓으며 생활 하셨습니다
추억하며
『매해 23년 24년 25년 벚꽃놀이는 그 당시 예비며느리 였던 제 와이프와 셋이서 항상 구경하러갔고
절 다니시는 걸 좋아하셔서 전국 각지의 유명 사찰을 모시고 방문하고 한식을 먹고 집에 왔었죠
글램핑도 처음 모시고 다니고 불멍도 좋아하시더라구요
어머니가 그렇게 못보고 가서 아쉽겠다던 결혼식도 올해 6월에 올리고
(혼주석에서 눈물 참는 모습에 저와 와이프도 덩달아 참느라 참 애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끝까지 우신건 인정 안하시더라고요)
더 많이 다니지 못해서 너무 아쉬운데 주변에서는 잘했다고 말씀해주시는 걸 보니 많은 추억을 쌓긴 한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찾아오는 내성으로 인해
풀피리 얼비툭스 론서프 키트루다 스티바가 젤로다
쓸 수 있는 약은 다 써본 것 같네요
사이사이에 장폐색으로 고생도 하시고
의료파업으로 지방에서 서울까지 응급실 왔다갔다하시면서 참 고생많았습니다
마지막 스티바가 와 젤로다 로 항암을 하시는 중에는 발바닥 부작용과 부종이 계속 심해져서
본가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이동 해야하는데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요양병원에서 생활 하시고 항암을 다니시는 중 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동이 점점 힘들어 졌고 결국 황달까지 와서 진료를 갈 수가 없어서 8월달에 항암을 중단하게 되었죠
마지막 호스피스
마지막이 점점 다가옴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걸을 수 있을 때 힘을 쥐어짜면서 입원해 계시던 서호 요양병원 옥상에서
자주 전화를 주셨어요 날이 너무 좋다고
퇴근하면 요양병원은 저에겐 일상이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는 어머니가 급성통증으로 진통을 잡지 못하고 장루가 계속 튀어나와서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했고 호스피스로 가길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시간이 다가온다는 건 저희도 알고있었죠
부산보훈병원 호스피스에서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왔지만 친형이 동래성모병원상담을 마친 상태라
먼저 동래성모병원으로 갔는데 부종이 심하시다고 산소콧줄 소변줄 등
기존에 있던 PCN배액관 과 장루 까지 온 몸에 이것저것 달리게 되면서 충격을 받으신건지
얘네들이 못 움직이게 한다 날 구속한다며 강한 섬망이 시작 되었죠
동래성모병원은 제 뜻이 아니었기에 어머니가 새벽에 제정신이 드시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니 뜻대로 해라 생각한대로 해라" 말씀하셨고
주말이 끼어있어서 2~3일 더 계신 뒤에야 부산보훈병원 호스피스로 무사히 가실 수 있었죠
호스피스는 서호요양병원, 동래성모병원 과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습니다
임종기에 진입하고있는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앞 선 요양병원 암센터 등 은 어머니가 갑갑해 하셔서 우리가 무리해서라도 휠체어 태우고
돌아드리려고 산소통 등 도움을 요청하면
'어차피 얼마 못 사실거같은데 뭐 저렇게 움직이고 싶어하나'
그런 생각을 표정에 다 드러내는게 참 엿 같았습니다
호스피스에서는 물론 휠체어 조차 못 타는 상태가 되었지만 간호사분들과 여사님들이 항상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다만, 여사님들 연배가 저희 어머니와 거의 동년배들 이셨는데 호칭을 "어르신"으로 하시다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베푸는거 좋아하시는 엄마는 아직 젊은 나이에 어쩌다 암이라는 병이 생겨서..
이제야 가족도 늘고 이곳 저곳 놀러 다닐 생각에 신나하셨을텐데..
호스피스에 계신 동안은 섬망의 연속이었고 정신을 차리시면 제 이름을 부르면서 미안하다고
본인이 죽어야 끝난다고 산소줄을 끊으려고 안간힘을 쓰셨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는 죄책감으로 진정제를 최소용량 투여 할 수 밖에 없었고
돌아가시기 10일 전 쯤 치킨이 드시고 싶다하셔서 제가 포장해갔는데
너무 멀쩡하게 BBQ양념치킨을 3~4조각 드셨습니다
흔한 보호자들의 착각처럼 앞으로 몇일은 괜찮아 지실 줄 알고 대화 할 기회가 있겠지 하며
그 때 대화를 많이 못한게 아쉽습니다
되돌아보니 그때가 회광반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전에도 발음은 계속 안됐는데
그날만은 발음이 명확하셨거든요
그 날 새벽부터 다시 아파하시더니 섬망과 앓는 소리가 심해졌고
거의 대화는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상주하는 날에는 침상 옆에 의자를 가져가 앉아서 손을 만져드리며 말을 많이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번씩 제가 듣고 싶은 말 어머니가 하고 싶었던 말을 동영상, 음성녹음으로 남겼는데
지금 들어도 가장 가슴 아프고 사무치는 대화는
"니하고 하고싶은 게 많았는데.." 이 말씀과
돌아가시기 4~5일 전
제가 사랑한다고 말하니
"사랑한다.. 아들.. 우리..아들.. 사랑한다..이제 간다 하늘나라로"
물론 발음은 많이 부정확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에 진심이 담겨있었고 이 때 임종이 다가옴을 본인도 느낀 것 같습니다
안아줄까? 물어보니 안아달라고 하셔서 그날이 의식이 있으실 때의 마지막 포옹이 되었네요
그렇게 마지막 3일은 제대로 눈 한번 못 뜨시고 앓는 소리만 내시다가
임종 날에는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는 상황에 호출을 받고
외출을 써서 도착하니 안심하신 건지 그때부터 혈압, 산소포화도,맥박 이 점점 떨어져서
임종 3분 정도 전에 급속도로 맥박이 떨어지시며 소풍을 떠나셨습니다
엄마에게
엄마 장례 지내는 동안에는 너무 슬퍼서 좋은곳 가라는 말 밖에 못했는데
엄마가 나랑 하고싶은 게 많았는데 못했던 것들 내가 전부 며느리랑 많이 다니고
내가 소풍가는날 많은 이야기보따리 싸가지고 들고 갈게
많이 보고싶을테지만 꾹 참고 기다려야해
아 그리고 호스피스 갈 때마다 아들보다 며느리부터 부르던 우리엄마
엄마가 좋아하던 꽃 며느리가 사가고 싶었는데 규정상 못들고갔는데
마지막 엄마 가시는 길은 며느리가 화환을 이따만큼 받아서
엄마가 좋아하던 꽃 냄새가 가득하더라
항상 고마웠고 사랑해 많이 보고싶을 거야 잘 참고 살아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