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곳저곳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집 앞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집 앞도 지나고
스캔들 양주집 간판과
희망맥주집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잠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중략
초복 중복 대서 지나고 입추와 말복을 앞두고 있는 한 여름이지만 마지막 주 수요일은 고궁이 무료이기에 아내와 덕수궁에 느릿느릿 다녀왔습니다. 덕수궁은 봄에는 석어당의 살구나무 꽃으로 유명하지만 여름에는 배롱나무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사이 꽃이 졌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석어당을 지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석조전을 바라보니 불이 난 것처럼 붉은색이 강렬하게 타올라 손으로 눈을 가려야 했습니다. 뻥치지 말라고요? 제 말이 과장인지 아닌지는 사진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덕수궁 사진과 공광규 시인의 ‘완행버스로 다녀왔다’라는 시 함께 보냅니다. 덕수궁 갈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고 올 때는 버스를 탔는데 지하철은 빠르고 정확하고 쾌적하기는 하지만 바깥을 볼 수 없어 갑갑하고 조금은 삭막합니다. 하지만 버스는 세상 밖을 볼 수 있어 흥미롭고 재미납니다. 그래서인지 지하철 승객의 표정은 엄숙하고 굳어있지만 버스 승객의 표정은 관광객처럼 환하고 입꼬리가 올라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완행버스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이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보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