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어지고 있다
박노해
태풍이 지나가고
폭염이 지나가고
장마가 지나가고
가야 할 것이 지나가고 있다
햇살이 가늘가늘
바람이 가늘가늘
꽃잎이 가늘가늘
모든 것이 가늘어지고 있다
그대 눈빛이 가늘어지고
내딛는 걸음이 정연해지고
내 안이 섬세해지고 있다
투명한 비움
신선한 고요
은미한 성숙
지나갈 것이 지나가고 있다
걸어올 것이 걸어오고 있다
秋霜(추상)의 때가 오고 있다
성큼, 가을이 마주오고 있다
“맞아야 정신 차리지”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뜨겁던 여름도 빗줄기 몇 번 맞고 정신 차렸는지 드디어 물러갈 생각을 하나 봅니다. 맞기 전에 정신 차리고 물러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계절이나 사람이나 물러날 때 물러나야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사진은 아내와 연희동에 식사하러 갔다가 내친김에 안산 자락길을 다녀올까 했지만 몸 컨디션이 허락하지 않아 연세대 캠퍼스 가볍게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곳에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핀다는 사실을 지는 배롱나무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는데 진즉에 올 걸 후회가 밀려옵니다. 한 여름 백일 동안 붉음을 유지하느라 애써준 배롱나무(百日紅 나무)에게 내년에 활짝 필 때 와서 찍어주마 약속하며 작별인사를 나눴습니다.
시인은 이 즈음의 햇살과 바람과 꽃잎이 ‘가늘가늘’해진다고 표현했는데 ‘하늘하늘’도 어울리고 ‘가을가을’도 잘 어울립니다. 흔히 봄은 빛으로 오고 가을은 색으로 온다고 하는데 과연 올 가을의 색이 얼마나 찬란하고 장엄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올가을은 차가 막히더라도 단풍 명소를 다녀와야겠습니다. 오늘도 선물 같은 하루 기쁘게 보내기를 소망합니다.